가깝게 느껴지지만 막상 가면 멀기도 하고 길도 막히는 전등사.
어딜가든 그지역 사찰? 절간은 항상 찾아 당기는 편. 잠깐 가서 걸으면 칼로리도 빠지고 마음도 경건해짐. 늙었다는 증거다. ( 블로그 카테고리중 절간을 하나 만들어야 겠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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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시절 아도라는 승려에 의해서 창건되었고 고려왕조 때 수축하였다가 일제강점기 때 중수된 적이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피해를 보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프랑스군으로부터 불상과 법전 등 문화재가 약탈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곳이 관군과 프랑스군의 교전지였다.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특이하게 중국종을 가지고 있는데 보물 제393호로[1] 철로 되어 있다. 원래는 중국 허난 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었고[2] 해방 후 인천의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하여 전등사로 옮겨졌다. 어떻게 한국으로 오게 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배를 통해 실어날랐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 일제강점기 말에 쇠붙이를 강제 수탈 하던 때에 중국에서 반입해나오던 것이 낙오되어 인천에 남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증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말 당시 전등사의 원래 범종이 공출당했고, 해방이 되자 주지스님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천항구를 뒤지고 다녔는데 이 때 누군가 부평 군기창 뒷마당에 종이 하나 있더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물론 원래의 범종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주인없는 채로 군기창[3]에 버려져있으면 곧 녹여져 무기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가져왔다고 한다.
대웅전 추녀 네 귀퉁이의 나녀상(裸女像)이 유명한데, 당시 대웅전을 건축하던 목수가 절 아래의 주막 주모와 눈이 맞아 돈을 맡겨두었으나 주모가 돈을 들고 튀었고, 이에 목수가 주모는 영원히 무거운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면서 속죄하라, 다른 사람들은 이를 보고 여색을 경계하라는 뜻에서 만들어넣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참고로 연산군 시절 화재로 인해 소실된 대웅전을 재건하면서 생긴 일.